보도 자료

CGN의 보도 자료를 확인해 보세요.
보도자료
[온누리신문] 이름 없는 빛, 그 위대한 무명(無名)
2025.06.21

융 심리학으로 풀어보는 CGN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

CGN에서 제작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無名)> 이 오는 6월 25일 (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올해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광복 8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또 을사늑약 120주년, 을미사변 130주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내한 선교 140주년이다. 이 영화 주인공인 오다 목사가 시무한 교토교회 창립 100주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 땅에 조용히 발을 디딘 두 일본인 선교사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그들은 ‘일본인’ 이라는 정체성 으로는 도무지 환영받기 어려운 시대에 자신을 철저히 비워내며 조선의 고통과 슬픔을 껴안았다. 그들의 삶은 복음을 전한 사역의 여정일 뿐만 아니라, 칼 융(C. G. Jung)이 말한 인간 영혼의 깊은 내면의 길, 곧 개성(Individua tion)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융에 따르면, 개성화란 단순한 자아실현이 아닌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을 통해 자기(Self)에 이르는 전인적 성장의 여정이다. 이 여정은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를 초대하는 자기 부인 (Self-denial)과 제자도의 삶(a life of disciple ship)과 깊이 닿아 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 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 두 선교사의 삶을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해석해 준다.

노리마츠 마사야스, 오다 나라지 하나님 나라 시민이자, 진리의 증인
‘노리마츠 마사야스(乘松雅休)’ 는 일본인이 라는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내려놓고 조선 사람으로 살았다. 그가 내려놓은 것은 단지 국적이나 문화만이 아니었다. 그는 융이 말한 ‘페르소나’ (Persona), 곧 사회 속에서 기대되 는 선교사라는 가면(mask)까지도 내려놓았다. 그는 조선의 말과 음식을 배우고 입으며, 민족적 우월감과 문명주의적 선민의식을 내려놓고 철저히 낮은 자리, 곧 참된 자아를 향한 길로 들어섰다. 그의 선택은 ‘적국의 선교사’ 라는 이중의 외로움과 오해 속에서도 자신이 가진 그림자(Shadow), 무의식 속에 잠재된 교만, 분리 욕구, 자기도취적 선민의식 등을 정직하게 마주한 내면의 투쟁이었다. 융 심리학에서 그림자란 우리가 의식적으로 거부하거나 억누른 내면의 부정적인 측면을 뜻한다. 개성화 과정에서 반드시 직면하고 통합해야 할 요소다. 노리마츠는 그림자를 숨기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르려는 한 인간이자 연약하고 고통받는 이웃의 친구로서 존재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자’ 보다 복음으로 ‘살아내는 자’가 되었다. <빌립보서> 2장 5~7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의 ‘비움’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융이 말한 자아의 해체, 곧 기존의 자아 구조가 무너지고, 더 깊은 자기(Self)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영혼의 탈각’(A spiritual transf ormation through ego-death)이었다. 인위적인 도덕적 행위가 아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었다. 노리마츠의 삶에는 융이 말한 아니마(anima), 즉 남성 안에 있는 여성적 요소인 감성과 돌봄, 연민이 풍성히 드러난다. 그는 조선인들과 밥을 나누고 병든 자를 돌보며 이름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과정 하나하나가 마치 <마태복음>의 말씀처럼 살아 있는 순종의 행위였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그는 ’선교사’ 라는 역할조차 벗고,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으로, 형제로, 이웃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냈다. 그의 내면은 복음으로 정제되고 다듬어진 제단과 같았으며, 그 제단은 불타는 제물이 아니라 조용히 깃든 향기였다. ‘오다 나라지(織田楢次)’ , 세례명 전영복은 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기독교로 개종했고, 일본 제국주의의 동화 정책에 반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박해받았다. 그는 기존의 이름을 버리고, 조선을 사명의 땅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단지 선교를 위한 귀환이 아니었다. 융이 말한 자기(Self)의 부름에 응답한 내면의 귀향이었다. 자기란 단순히 개인적 자아를 넘어 무의식과 의식의 총체적 중심으로서 하나님과 일치 를 지향하는 깊은 존재의 핵심이다. 오다의 삶은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영웅 원형’(archet ype of the Hero)을 떠오르게 한다. 진정한 영웅은 외부의 적과 싸우기 전에 먼저 자기 내 면의 그림자와 대면하고, 그것을 통과해 자기를 완성해 간다. 오다는 국가와 민족의 명분을 내려놓고, 양심과 진리의 부르심에 따라 고난 을 선택했다. <요한복음> 12장 26절은 말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를 섬기는 자는 내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시리라.” 그는 이 말씀처럼, 명예나 안락이 아닌 진리 를 따라 걸었고, 결국 하나님의 귀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그의 삶은 바울의 고백처럼 해석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그는 더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자, 그 진리의 증인이었다. 이 두 사람의 삶은 융이 말한 자기실현 (Self-actualization) 여정을 보여준다. 그들은 외적인 사역의 업적보다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화해와 진리 앞에서 자아 확립을 선택했다. 그 여정은 외롭고, 불편하며, 때론 침묵을 강요당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선교였고, 신앙의 실천이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 그들은 세상적으로 강하지 않았고, 성공하거나 명예를 얻지도 않았다.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 자가를 지고 따라갔기에 하나님 안에서의 강함, 곧 성령 안에서의 충만을 얻었다.

이름 없음, 가장 위대한 이름
영화 <무명>은 ‘이름 없음’ 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가장 위대한 이름을 드러내는 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듯이, 그들도 자신을 버리고 낮아져 타인의 고통 속으로 들어갔다. 그 낮아 짐은 단지 인간적 동정이 아니다. 성령께 이끌 린 존재론적 변모다. “그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 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 11). 그들은 말로 증언하지 않았고, 삶 전체로 복 음을 증언했다. 이름을 감추고도 진리를 드러 냈다. 침묵이 오히려 오늘 우리에게 더 크고 깊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의 이름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가?”, “나는 나의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는가? ”, “나는 사회적 가면 뒤에 숨은 참된 자기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있는가?” 그 해답은 <로마서> 6장 8절에 있다. “우리가 만일 그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라.” 이름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 없음 속에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은 더욱 뚜렷 하게 드러났다. 무명은 결국 하나님 안에서 가 장 분명한 이름이었다. ‘ 위대한 무명(The Greatness of the Unnamed)’ 이라는 하나님 의 역설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출처: 온누리신문(2025.6.22.자) 글: 김진국 집사 (한강공동체.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따뜻한 심리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