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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여서 외롭지 않은 '은혜의 외길' - 김옥남 목사
2026.08.04

예수님과 함께여서 외롭지 않은 '은혜의 외길'

"난 평생 예수님께 미쳐 살아온 사람이예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이 있다. 이는 미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올해 나이 87세. 예수님에게 미쳐 살며 가난과 고난을 극복해 온 의지의 한국인 김옥남 목사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 보리밥물로 생명을 연명하던 갓난아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이 있다. 전북 남원의 깊은 두메산골, 딸만 셋인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옥남 목사의 생애는 시작부터 비극과 기적의 연속이었다. 대를 잇기 위해 후처로 들어갔던 어머니는 청각장애 1급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 먹일 젖 한 방울 없던 시절, 갓난아기였던 그녀는 산에 버려질 위기에 처했다.

 

“어머니가 배고픔에 집을 나가고 아버지가 키울 수가 없으니까 나를 엎고 산에 가서 묻어버리려고 하셨대요. 죽은 뒤에 묻으려고 산에 놓고 내려오시다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는데, 그 어린 것이 아빠를 보고 방긋 웃더랍니다. 그 웃음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안고 내려오셨지요.”

 

우유나 기저귀는커녕 쌀밥조차 구경하기 힘든 시절, 아버지는 노란 고무줄 구멍을 뚫어 보리밥을 안칠 때 나오는 묽은 숭늉 물을 담아 아기의 입에 물렸다. 그렇게 겨우 이어간 생명이 오늘날 어려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귀한 통로가 되었다.

 

“육신의 아버지는 버리려고 하셨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보리밥물 쪼옥쪼옥 빨아먹고 살아난 이 생명,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살려주신 것이지요.”

 

# 고단했던 인생이지만, 참 열심히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젖 동냥으로 시작한 남의 집 살이가 20년 가까이 이어졌다. 동네에서 밥 한 끼 씩 거둬 키우다 형편이 어려워지면 옆집으로 보내기를 수십 번. 서른 집도 넘게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외롭고 서러운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16살쯤 됐을 때, 외로운 마음을 의지하고 싶어 하나님을 찾았다.

 

“교회에 갔는데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고 등록도 안 시켜줬어요. 그래도 혹시 물어봐 줄까 싶어 예배가 끝나고 서성거리다 오곤 했지요. 남의 집 살이를 하니 주일에도 주인이 교회를 못 가게 하면 못 가고, 다니라고 하면 다니면서 오직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길 사모했습니다.”

 

언젠가 식모살이를 했던 집의 안 주인이 평양에서 내려온 기독교인이었고 믿음 좋은 권사님이었다. 기도하는 방법과 찬송가도 알려주고 성령을 구하라는 권면도 해주었다. 하나님 백성이 됐다는 믿음이 생기자 고단했던 일상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방에서 서울로 옮겨가며 식모로 숙식을 해결하다 스무 살이 됐을 때, 인력 사무소 소개로 월급을 받는 정식 가정부가 됐다. 몇 년 돈을 모아 27살이 되었을 때, 안양에서 전세로 가게를 얻어 처음으로 자립했고, 당시 동네 사람의 중매로 지금의 남편(이철구 장로)을 만나게 됐다. 결혼 후에도 삶의 파도는 멎지 않았다. 안 해본 일이 없었지만, 늘 빚에 시달렸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사실 이철구 장로는 지금까지 가장 큰 도움을 동역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사남매를 낳아 키웠고, 아들 둘이 신학을 전공해 첫째 아들은 전도사로 둘째 아들은 개척 교회 목사로 지금까지 사역을 하고 있다. 평생 전전긍긍하는 인생이었지만, 김 목사는 힘들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불탔다. 그 사모함이 커지며 성결신학대를 졸업한 큰 아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했다.

 

# 62세의 도전, 다람쥐처럼 살아온 인생

 

돈이 없어 동네 산골 약수터 기슭에 판자를 대고 천막을 쳤다. 나무 간판으로 교회 이름을 달았고 십자가는 땅에 박았다. 그게 김옥남 목사의 첫 교회였다. 하지만 아들과 마음이 안 맞아 결국 아들은 독립하고 첫 교회는 엄마에게 맡겨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김 목사는 직접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가 예순 두 살이었다. 최고령 나이에 초중고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신학교 입학까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세워가겠다는 일념 하에 의지와 성실함으로 대한신학대를 졸업해 1995년 목사가 되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교회를 일궈나가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셨다. 당시 하나님이 주신 아이디어로 교회 옆에서 이철구 장로가 사슴 한 마리를 키우는 것을 시작으로 사슴농장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임대 교회를 얻어 목사도 청빙했다.

 

이후 교회를 일궈가는데도 산전수전을 겪었다.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장애를 가진 가족을 몰래 버리고 가기도 하고 무의탁 노인이 찾아오기도 했으며 어렵게 사는 엄마가 딸을 맡기고 사라지기도 했다. 진정한 전도자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그때부터 그들을 하나 둘 씩 거두기 시작했다. 보호자를 잃은 영혼들과 같이 살며 집은 교회이자 복지관이 되었다. 하나님의 일을 쫓다 보니 나중에는 빚도 갚고 중앙총회에서 일을 하며 76세 나이에 은퇴했다. 첫 교회의 이름이 은혜교회’.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간판이자 교회 이름도 은혜교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인생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기 위해 지금도 하루에 몇 시간 씩 기도하며, 기도회와 주일 예배를 직접 인도한다.

 

# ‘난 하나님께 미친 사람’

 

김옥남 목사는 인터뷰 내내 이와 같이 말했다. 돌아보면 그녀의 인생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명지대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 노인복지 과정, M.DIV 등 공부를 시작하고 십 수 년 동안 갖가지 자격증을 따며 교회와 함께 복지센터 은혜의 집을 운영했다.

반지하 빌라 본인의 집에서 시작해 다세대 주택 건물의 복지 시설과 생활관, 교회를 확장해 일궜다. 은혜의 집에서는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오갈 데 없는 독거 노인, 고아 등 약 15명을 먹이고 입히고 함께 살며 돌봤다. 돌봤다. 열 살 배기 고아를 거둬 대학까지 졸업 시키고 결혼 시키는 등 그야말로 여러 사람의 인생을 키워냈다. 그렇게 그녀는 은혜의 집을 1992년부터 2016년까지 운영했다. 항상 재정이 어려웠으나 그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다. 어려울 때마다 공급하시고 피할 길을 내시며 일궈나가는 방법을 친히 인도하셨다. 십 수 년 동안 작은 공터의 텃밭에 무 감자 배추 호박...안심은 것이 없었다. 심고 키운 채소 등으로 자급자족하며 몸을 사리지 않는 헌신으로 외로운 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그녀는 운영할 돈이 없으니 소위 몸으로 때웠지라면서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재미있게 살았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안 먹고 안 쓰고 고생하면서 모은 돈으로 산 작은 텃밭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셨고, 은혜의 집 문을 닫고서는 큰 수확으로 돌아온 땅 또한 하나님께 바쳤다.

 

# 후원 결심...‘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작은 텃밭이 값이 올랐다. 김 목사는 그 땅에 사회복지 시설을 건축하고 싶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그동안 사역을 너무 힘들게 해왔기 때문이다. 소위 요즘 말하는 몸테크를 그만하고 싶었던 나이가 됐을 무렵, 그녀의 생각이 바뀌었다. 인생을 정리하는 나이대에 들어서며 육신의 한계를 느낀 그녀는 '힘들게 목회를 하고 있는 첫째, 둘째 아들에게 땅을 줄까, 형편이 녹록치 않은 딸에게 물려줘야 할까' 고민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도 중 하나님 말씀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드려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단은 단호했다.

 

“딸이 빚이 많아서 좀 갚아 달라고 하고, 목회하는 아들도 어려워서 교회 하나 지어주면 좋겠다고 했지요. 하지만 내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돈은 하나님께 드릴 물질이다. 너희들 빚은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고, 너희 목회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 내 힘으로 주는 건 하나님 물질을 훔치는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유산 포기 도장을 찍게 했습니다.”

 

평생 고생하며 살았던 그녀의 삶이었지만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생명까지도 바치고 싶은 하나님에 대한 끝없는 사랑만이 그녀가 살아가는 목표였기 때문이다.

 

# 8,640만 원의 후원...‘수개월 TV를 직접 일일이 모니터링 했지요’

 

하나님께 잘 돌려드려야 하는데, 어디다 해야 할 지 고민이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평생 사람을 돌보고 복음을 전한 수보다 미디어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 방송이란 매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쓰시는 기관이니 어느 정도 증명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갈 수 없는 곳까지 미디어가 닿을 수 있다면 전 재산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기독교 방송 5개사를 수개월 동안 매일 모니터링 했다.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은 없는지 순수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기도하며 모니터링 하다 기독 방송국 5곳에 공평하게 나누자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은행을 갔는데 43천만 원이 넘는 돈을 평등하게 5곳으로 나누니 정확히 864십만 원 씩 오차 없이 나눠졌다. 고민 없이 바로 한 날 한 시에 모두 나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조건 없이 후원한 그녀는받을 때보다 줄 때 기쁜 사람이라며, 자신의 후원이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 CGN에 나눈 이유...“순전한 보혈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수많은 곳 중 CGN을 후원처로 정하고 평생 모은 거액을 선뜻 내놓은 이유에 대해 김 목사는 단호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나님의 복음을 잘 전하길 원해서죠. 오늘날 많은 설교와 방송들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형통하다'는 육적인 이야기만 전하는 것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옷 따뜻하게 입혀주고, 깨끗한 물 파주고, 밥 배불리 먹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육신을 위한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 회개의 메시지, 오직 순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 CGN은 시작부터 선교사를 위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방송국

 

“CGN은 시작부터 선교사를 위해, 그리고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방송국 아닙니까. 어설픈 세상 소리나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소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의 본질과 회개의 복음을 전 세계 땅끝까지 전하는 거룩한 통로라고 믿습니다. 사사로운 개인이나 검증되지 않은 곳에 주면 잘못 쓰일 수 있지만, 오직 복음만을 위해 세워진 공공의 선교 방송국에 주면 가장 깨끗하고 강력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김옥남 목사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복음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진정한 회개와 십자가 보혈의 복음이 CGN을 통해 전 세계에 전파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작은 옥합을 드렸다고 했다.

 

# CGN을 향한 엄중한 부탁...“복음에는 타협이 없다”

마지막으로 김 목사는 성경은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성경을 둘로 나누면 하나님이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 딱 두 개로 나뉘어요. 목사라면 하나님 말씀을 엄중히 전해서 성도들이 예수를 제대로 잘 믿도록 목회자가 복음을 바로 전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목사가 아닌 독사가 되어버린다며, 그런 면에서 CGN이 광고를 안 받는 순수 복음 방송인만큼 전파되는 말씀의 순수성과 다양성을 지금처럼 꼭 지켜주기를 당부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 평생을 가난한 이들의 엄마이자 목회자로 살아온 김옥남 목사.

김 목사와의 만남은 사실 인터뷰라기보다 한 편의 설교를 듣는 것 같았다. 그녀가 CGN에 전달한 후원금은 단순한 금전이 아니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을 향한 핏빛 고백이자, 한 영혼이라도 더 천국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절박한 어미의 마음이었다.

그 거룩한 옥합의 향유가 CGN을 통해 열방으로 퍼지길, 또 천국에 가는 날까지 복 있는 사람으로 은혜를 구하고 감사하며 나누는 삶을 살겠다는 김옥남 목사의 바람처럼 건강하게 끝까지 사역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