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나라지와 전재규 장로, 두 사람의 삶을 잇는 복음의 길'
雲白雪白我心白 (운백설백아심백)
海深山深主恩深 (해심산심주은심)
“구름도 희고/ 눈도 희니/ 내 마음도 희고
바다도 깊고/ 산도 깊으니/ 주님의 은혜도 깊어라"
전재규 장로의 집에는 한 폭의 한시가 걸려 있다.
이 글을 남긴 사람은 일본인 목사 오다 나라지(織田楢次, 1908-1980)다.
한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오다 나라지와 전재규 장로의 삶에는 ‘은혜’라는 말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인연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유년기를 보낸 전재규 장로에게 일본은 쉽게 좋아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교회에 있던 종각이 전쟁 물자를 만들기 위해 뜯겨 나가는 모습을 보았고, 일본의 탄압으로 고통을 겪던 이웃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인연이 찾아왔다. 일본인 목사 ‘오다 나라지(織田楢次)’. 독실한 불교 집안이자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회심한 뒤 20대 초반 조선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이 조선에 지은 죄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본인인 자신이라도 속죄하고 조선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택한 속죄의 길은 복음 전파였다. 전라남도부터 함경북도까지, 조선의 산길과 탄광을 비롯한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도 여러 차례 있었다.
“호랑이굴에서도 자고, 탄광에서도 자고, 조선팔도를 다니며 죽다 살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분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복음 전파를 우선한 사람이었습니다.” ― 전재규 장로
한국인에게도, 일본인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
오다 나라지(織田楢次, 1908-1980)는 한복을 입고 한국어로 설교한 일본인 목사로 알려져 있다. 전영복(田永福)이라는 한국 이름도 지어 사용했다. 전(田) 자를 입 구(口) 안에 열십 자(十)가 들어 있는 글자로 풀이하며, 십자가를 품은 입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곧 영원한 복(永福)인 십자가(十)를 입(口)으로 전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복이며,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결국 조선을 돕는 위험인물로 분류돼 고국 일본으로 추방됐지만, 일본에서도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으로 쫓겨난 뒤에는 교토(京都) 교회에서 재일조선인들을 섬겼습니다. 전후 자이니치(재일조선인)의 삶은 핍박과 설움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죠. 오다 나라지는 한복을 입고, 심지어 갓까지 쓰고서 유창한 한국말로 설교했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을 온전히 껴안았습니다.” ― 전재규 장로
조선과 일본 어느 쪽에서도 온전히 환영받기 어려웠던 사람. 오다 나라지는 오히려 그 경계에 서 있었기에 양쪽의 아픔을 품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 전영복(田永福)이라는 이름의 유래 및 한자 풀이는 오다 나라지 자서전 『지게꾼』을 참고함.)
‘엘리야의 겉옷을 받은 엘리사가 된 것 같았습니다’
전 장로와 오다 나라지 목사의 첫 만남은 광복 후 한참이 지난 1977년이었다. 당시 의사였던 전재규 장로는 동산병원 전도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었다. 병원 수양회의 강사를 찾던 중 오다 나라지를 알게 됐고, 처음 만나서 무엇보다 놀랐던 건 그의 유창한 한국어였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말솜씨에 농담까지 자유자재로 곁들어서 부흥회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오다 목사님이 전하는 복음에는 누구나 빠져들 수밖에 없는 깊은 영성이 있었습니다.”
부흥회를 통해 만남을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일정을 마친 오다 나라지 목사를 전 장로가 동대구역까지 배웅했다. 기차를 기다리던 짧은 순간, 오다(전영복) 목사는 자신이 평생 쓰던 캘빈 모자를 훌쩍 벗어 전 장로의 머리에 씌웠다.
장로님에게 한평생 쓰고 다녔던 모자를 주고 싶습니다.
이 모자는 종교개혁가 칼빈이 쓰셨던 것과 꼭 같은 것으로 이 모자를 인계해 줄 사람은 전 장로입니다.
- 오다 나라지(전영복) 목사가 전재규 장로에게
오다 나라지가 건넨 것은 단순한 모자가 아니었다. 전 장로는 훗날 그 순간을 엘리야 선지자가 제자 엘리사에게 겉옷을 넘겨준 장면에 비유했다. 오다 목사가 평생 걸어온 복음의 길과 한국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건네진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오다 목사와의 만남은 전 장로의 삶에도 오래 남았다. 평생 크리스천으로 살아왔지만, 마음 한편에는 일본에 대한 미움이 있었다. 그러나 오다 나라지, 전영복이라는 한 사람을 만나면서 일본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국적보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지게가 되어'
이 인연으로 훗날 오다 나라지 목사가 직접 건넨 자신의 자서전 『지게꾼』을 한국어로 엮어 출판하기도 했다.
생전에 오다 목사는 자신의 삶을 ‘지게’에 비유하곤 했다. 조선에 처음 왔을 때, 지게를 지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한 가장의 모습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도 일본의 지게가 되어 한국에 사죄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에 가보니까 한 가장이 지게 하나를 등에 지고 다니며 가족을 먹여 살리더군요.
나는 일본의 지게가 되어서 한국에 사죄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오다 나라지(織田楢次, 1908-1980)
전재규 장로에게 오다 나라지는 한일 역사의 아픔을 보여주는 한 사람을 넘어, 복음이 국경과 민족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 주의 은혜 깊도다!
오다 나라지 목사가 써준 한시는 전재규 장로 가정의 가훈이기도 하다.
“제 한평생 삶과 닮은 부분이 많아서 이게 우리 가정의 가훈입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뤄진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요즘 하는 일들도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어서 된 것입니다. 전부다 은혜입니다.”
일평생 한 번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던 것도, 의무장교와 군목으로 섬겼던 시간도,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세웠던 일도, 총장을 맡아 신학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일도 모두 자신의 능력이 아닌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도 ‘은혜’다. 자녀들의 이름에 전부 은혜를 뜻하는 한자를 넣었을 정도다.

어쩌면 오다 나라지와 전재규, 두 사람의 삶을 잇는 것은 국적도, 시대도, 역사도 아닐지 모른다.
한 사람은 일본의 지게가 되어 한국을 섬겼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삶을 이어받아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전 장로가 붙든 말은 하나였다.
“전부 다 은혜입니다.
바다도 깊고 산도 깊지만, 주의 은혜가 가장 깊습니다.”
🎞 오다 나라지(織田楢次, 1908-1980) 목사의 이야기는 CGN 다큐 영화 <무명(無名)>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영화는 찾아가는 상영회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 영화 <무명(無名)> 찾아가는 상영회
― 문의 : 02) 3275-9364
― 신청하기: https://form.naver.com/response/lKmE1XAAqlIqhbBmpZ1bJ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