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carpe diem)'
한국어로는 '오늘을 붙잡아라' 혹은 '현재를 즐겨라'로 종종 번역되곤 합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대사로 등장하여 대중화된 이 말은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남긴 오래된 시구입니다. 라틴어 '카르페(carpe)'의 원뜻은 '꽃이나 열매를 따다, 거두다'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카르페 디엠은 어쩌면 이렇게도 읽을 수 있겠습니다.
‘오늘을 따서 거두어라.’
주어진 하루를 흘려보내지 않고, 오늘이라는 밭에 씨를 뿌리고 정성껏 가꾸어 열매를 거두는 일. [CGN 매거진] 9월 호에서는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신은경 권사를 만났습니다. 매일의 작은 기록과 배움, 기도와 실천이 켜켜이 쌓인 시간은 어느새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깊고 넓은 뿌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 웃는 얼굴로 '주름지게'
한국 최초 여성 뉴스 단독 진행자. 1981년 9월부터 1992년 8월까지 KBS 뉴스를 진행하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했던 신은경 권사(前 KBS 앵커)는 이제 11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전하다는 인사에 그녀는 유쾌하게 답했습니다.
"인위적으로 뭘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걸 받아들이는 게 좋고요."
최근 출간한 책, 《나는 이렇게 나이 들기로 했다》에서도 사진 기자에게 "얼굴의 주름을 지우지 말라고, 이거 만드는 데 꽤 오래 걸렸다"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이 듦을 불안해하기보다 산뜻하게 수용하는 모습에는 지나온 시간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품어온 사람만의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Q. 전 국민이 아는 앵커에서 지금은 작가로 사람들과 만나고 계십니다. 요즘 일과는 어떻게 보내시나요?
"아침에 눈을 뜨면 '모닝 페이지'라는 3페이지의 글쓰기를 해요. 거창한 무언가를 써야 한다고 부담 갖지 않고, 생각나는 것들을 주르륵, 쏟아내듯이 쓰죠. 완벽한 글이 아니라 파편 같은 기록이에요. 그러다 문득 노트를 들춰보면, '이 부분은 책에 넣어도 좋겠다'싶은 문장을 발견하기도 하고요. "
매일의 기록은 어느 순간 아이디어의 땔감 창고가 되었고, 그 시간은 11권의 책을 써낸 작가에게 단단한 준비 운동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 성경 필사와 조회수 400만을 넘긴 성경 낭독(유튜브 채널: 성경 읽는 신권사), 약 1200일이 되어가는 불어 공부, 신문과 잡지 등에 칼럼 기고까지(* 신은경 권사는 13년째 시니어 전문 신문 <백세시대>와 2년째 온라인 잡지<디멘시아>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그녀의 하루는 작은 습관들로 촘촘히 채워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굉장한 원고료를 받느냐고 묻더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오랜 기간 쓰냐면서요. 그런데 제가 중요하게 보는 건, 돈이나 그 잡지의 명성 같은 부분이 아닙니다. 전 제 글을 모은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썼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나의 아카이브를 쌓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돈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게 맡겨진 일을 하는 거죠.
시간이 지나 매일의 기록은 책이 되었고, 기고했던 칼럼은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한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쌓은 일들이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이들에게 가닿은 것이죠.
신은경 권사가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는 아카이브(Archive,'기록 보관소')입니다.
그녀에게 ‘아카이브’는 오늘을 성실히 살아낸 흔적입니다. 그리고 그 아카이브의 한가운데에는 오랫동안 붙잡아온 또 하나의 기록, 신앙이 있습니다.
# 하나님께 보내는 걱정 편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 소중한 순간들이 있는데, 우리는 종종 그것들을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전 그게 너무 아까워요. 그래서 썼죠."
Q. 그중, 잊지 못할 순간을 나눠주신다면요?
"딸의 대학 진학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눈물 바람으로 절박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합격하자 오히려 더 큰 눈물이 팡, 터졌습니다. “하나님,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하면서요.(웃음) 그때 보여주신 말씀이 바로, 이사야 41장 10절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나는 네 하나님이다'는 구절이 영어로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어요. ‘I am your God.’ 특히 ‘유어(Your, 너의)’가 압도적으로 커다랗게 보였죠. 마치, ‘얘야, 내가 너의 하나님인데 몰랐어? 바보야.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의 하나님'이란다(I am your God),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전 그런 순간순간이 신앙생활에서 너무 재미있어요."
개구쟁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모습은 아버지 하나님과 재미있게 노는 딸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신이 난 얼굴로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특별한 방법도 나눠주었는데 일명, ‘하나님께 보내는 걱정 편지’입니다.
"어느 날은 걱정을 많이 하는 제 자신이 참 지겹더라고요. 그래서 종이에 편지 쓰듯 걱정을 쭉 적어 내려내려갔죠. 그리고 편지 접듯이 접었습니다. '어차피 내가 해결할 수도 없는 일, 하나님께 맡겨버리자!' 결심했죠. 그리고 '하나님! 걱정 편지입니다.'하고 송부했어요. 그런데 한참 후에 그 편지를 열어보니 이뤄진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놀랍죠? 물론 100퍼센트 저의 뜻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요."
걱정을 적어 하나님께 맡기고,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펼쳐보는 것.
신은경 권사에게 ‘걱정 편지’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써 내려가는 신앙의 아카이브였습니다.
# '오늘'이라는 '밭'을 가꾸는 일
Q. 성경공부 모임도 이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름이 '슬기로운 열 처녀 모임’이에요. 주인을 기다리며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에 빗대었죠(마 25장). 줌(zoom)으로 15명이 매주 모여서 성경 전체를 25주 동안(구약 13주, 신약 12주) 공부합니다. 신기한 일은 본문은 랜덤으로 읽는데, 그날의 말씀이 가장 필요한 멤버가 읽게 되더라고요. 또 '진주 나눔'이라는 그날의 소회를 나누는 시간에도 큰 은혜를 받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변화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짜릿한 희열을 느끼죠. '아, 이 맛에 사는 거지!', 싶어요."
말씀을 통한 미세한 변화. 삶의 방향을 바꾸기로 결단하는 찰나의 순간. 서로 믿음이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는 관심.
그게 열매고, 성취죠.
산다는 게 대단한 일을 해야만 업적이고 훌륭한 게 아닌 것 같아요.
가까운 사람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는 게 중요한 거죠.
Q. 신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요?
"성경을 바로 아는 거죠.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지, 선악과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것은 어떤 의미인지…, 물론 모르고도 믿을 수 있겠지만 알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어요. 알면 알수록 믿음의 뿌리도 더욱 깊어짐을 느낍니다."
말씀을 알아갈수록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사명’으로 이어졌습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습관적으로 혹은 끌려가듯이 하는 사람이 있고,
매 순간을 인생의 기점이라고 여기고 임하는 사람이 있지요.
후자는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에요.
말씀을 배우는 일과 삶을 살아내는 일. 그녀에게 둘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을 묻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요새는 문득문득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의 성품을 만나고 싶은 거예요.
무언가를 움켜쥐기보다는 손을 풀고, 그 손으로 주변 사람의 어깨를 쓰다듬는 삶.
화려함보다는 지극히 작은 것들에 마음을 쓰고, 그것들을 오래 들여다보고 가꾸는 삶.
그 삶에는 애쓰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묻어납니다.
신은경 권사와의 인터뷰를 마치며 풍성한 밭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 밭에는 오늘의 기쁨과 감사가 자라고, 오늘의 배움과 기도가 뿌리내립니다.
오늘 만난 사람을 마음에 담고, 오늘 받은 작은 은혜를 기록합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해결할 수 없는 걱정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렇게 쌓인 하루하루가 삶이라는 깊고도 넓은 아카이브가 되어 가죠.
어쩌면 ‘삶의 비범함’은 이토록 ‘평범한 오늘’을 정성껏 살아낸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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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EW 하늘빛향기 47편> 신은경 권사 편
<레디온 197편> 신은경 권사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