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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매거진-1] 감독 인터뷰: 다큐 영화 <무명(無名)>
2025.07.03

[CGN 7월 매거진]에서는 최근 개봉한 기독 다큐 영화 <무명(無名)>의 유진주 감독을 만났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가려졌던 두 일본인 선교사를 수면 위로 꺼내어 세상에 내놓기까지. 약 3년여의 시간을 '무명' 선교사들을 쫓아, 생각하고 호흡하며 걸어온 길. 그 과정에서 발견한 감춰진 보배 같은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CGN 입사 15년 차, 영화 <무명>의 유진주 감독.

감독이란 호칭보다는 PD로 불리는 게 익숙하다며 아직은 낯선 느낌이라는 유진주 감독. 어쩌면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딘 <무명>의 두 선교사님과 비슷한 기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연출한 작품이 영화로 개봉하게 된 심정을 물었습니다.

유진주 감독 : 축하한다는 연락을 주변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방송하면서 만난 출연자들뿐 아니라 평소 알고 지냈던 선교사님들에게 꽃다발까지 받아서 얼떨떨했어요. '난 직장인인데 왜 그러지? 평소에 하던 일을 롱-텀(long-term)으로 했을 뿐인데?'라는 생각에 좀 신기하기도 했고요. 물론 <무명>은 공들인 작품이고 힘들여 작업했지만 원래 하던 일을 했을 뿐, 마칠 때는 같은 마음이거든요. 거창한 무언가를 한 것처럼 책임감을 갖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Q. 영화감독이 꿈이었나?

유진주 감독 : 전혀 아니에요. 원래는 라디오 피디가 꿈이었고 스스로를 '텍스트적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죠. 저에게는 극장에 걸리든, TV로 보든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져요. 물론 다큐 PD로서 동경하는 마음은 있었죠.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같은 좋은 다큐가 극장에 걸리고 많은 사람에게 보이고, 화제를 모으면 도전이나 인사이트를 받았고요. TV는 매체 특성상, 한차례 방송으로 소비되는 성격인데 영화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면이 부러웠습니다.

Q. <무명>은 처음부터 영화로 기획된 작품인가?

영화 상영이 결정된 건 작년 여름 무렵이었습니다. 8년 전 제작한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이하 서서평)를 이어나갈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무렵이었죠.

<서서평>은 관객 수 12만 명이란, 독립 영화계의 괄목할 만한 스코어를 기록한 CGN의 대표 콘텐츠입니다. 극장 상영 스코어 이상으로 교회 및 해외 상영회도 꾸준히 활발하게 이어졌죠. 일반 영화 상영이나 방송과는 다른 모양의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유진주 감독 : 기독 영화의 경우, 수요나 쓰임 자체가 기성 영화와는 많이 다릅니다. 방송이 아닌 영화라는 포맷이기에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요.


Q. 특별히 '일본인 선교사'를 소재로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

유진주 감독 : 2018년에 '러브소나타 10주년 특집 <1퍼센트의 기적>'을 제작했었습니다. 일본 선교 역사에 대해 공부하면서 상당히 재미있고 독특한 나라라고 느꼈고, 동시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언젠가는 일본 선교 역사를 다루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죠. 둘째는 개인적인 경험인데, 일본 러브소나타 청년 대상 집회에 참석한 일이 있어요. 선교 비전을 품고 오는 길에 이런 기도를 드렸어요. “하나님, 지금까지는 제가 주인인 삶을 살았는데 이제 하나님 이끄시는 대로 살겠습니다.”

당시 취업 준비생으로 원하던 곳의 최종 결과를 기다리던 참이었는데 결과는 낙방이었죠. 사실 합격을 예상했기에 황당한 심정이었지만 일본은 개인적으로 비전을 확인한 장소였고, 그 경험이 일본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북돋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CGN에서 일하던 중, 소다 가이치 선교사(1867-1962) 님을 다루려고 취재하게 되었어요. 양화진 묘역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 선교사죠. 그 과정에서 노리마츠 선교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일본 최초의 선교사가 조선으로 왔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일본 침략과 강압적 지배라는 엄혹한 시대적 현실. 그 가운데 복음을 들고 비탄에 빠진 조선에 찾아온 일본인 선교사가 존재했다는 아이러니. 이런 상황을 납득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에는 감정적인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료를 찾고 검증에 검증을 거듭할수록 이 사실은 외면할 수 없었고 더욱 또렷해졌다고 유 감독은 고백합니다.

(좌)노리마츠 선교사 / (우)오다 선교사

'무명의 선교사들을 쫓은 여정'

두 선교사님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한양에서 김 서방 찾기' 같았다고 말합니다. 실낱같은 자료 조각을 모으고 모아서, 희미한 빛을 향해 믿음으로 따라간 여정이었죠.

유진주 감독 : 처음에는 책 <사랑으로 잇다>(나카무라 사토시作)로 조사했어요. 일본인 선교사님 10명의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핵심 주제는 한일 간의 가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 소위 '가교론'이에요. 원래는 세 선교사를 모두 담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1차 일본 출장 때, 소다 가이치 선교사님을 포함해서 자료조사를 했죠. 참고로 소다 가이치 선교사는 한국에서 고아원 사역을 오래 하신 분이고, 그 전신이 서울 후암동에 남았었지만 해방 후 화재로 전부 소실됐습니다. 결국 자료 부족과 기타 여건 상으로 아쉽지만 최종적으로 제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조 : 소다 가이치가 운영한 보육원은 '가마쿠라 보육원'(現 영락보린원))

일본인 선교사에 대한 영화를 만들 때, 먼저 수반되어야 할 작업은 ‘친일 행적은 없는가?’에 대한 치밀한 조사였다고 합니다. 그 행적에 대한 확인을 거듭하고 최종적으로 노리마츠와 오다 선교사를 선택하게 되었죠.

유진주 감독 : 노리마츠 선교사님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라는 임팩트가 굉장히 컸고, 조사하면 할수록 궁금하고 마음에 울림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오다 나라지 선교사님은 노리마츠 선교사의 후대 분으로 육성 녹음이 남겨있다는 점과 일본인으로서 신사참배 반대를 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죠. 한국의 크리스천조차도 목소리를 못 내던 상황에서 일본인이 대중연설까지 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사무라이'와 '승려'?

놀랍게도 노리마츠 선교사님은 유명한 사무라이 가문 출신, 오다 선교사님은 권세 있는 승려 가문 출신입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특권층으로 탄탄한 미래와 삶이 보장되어 있었죠. 하지만 손에 쥔 이익을 모두 버리고, 가시밭길로 자처하여 들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품고 말이죠.

한편 영화를 보면, 이 두 선교사님의 캐릭터(성격)를 비교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복음을 들고 조선에 온 두 선교사님은 각각 당시 조선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조선인들을 포용했습니다.

유진주 감독 : 두 선교사님의 키워드는 차별화됩니다. 노라마츠 선교사님은 '사랑', 오다 선교사님은 '정의감'이라고 축약할 수 있죠. 오다 선교사님의 경우는 억압받고 투쟁하는 조선인 옆에서 진실의 목소리를 내는 성향이 더 뚜렷하게 그려졌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식과 모습이 캐릭터에 따라 다르죠.

Q. 영화에 넣고 싶은데 못 넣은 이야기도 나눠달라.

유진주 감독 : (곰곰이 생각하다가) 오다 선교사님은 기차를 안 타셨대요. 이유는 '일제가 만든 철도'라서! 본인이 수레를 직접 만들어서 나귀 타고 다니면서 전국 전도 일주를 다니셨죠. 특히 평양 쪽을 바롯하여 북한 지역을 많이 다니셨는데,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사실 북한 지역 전도를 많이 하셨기 때문이에요.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많은 지역을 단시간에 그렇게까지 전도 다니셨다는 점이에요. 그야말로 종횡무진하신 거죠.

일제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여서 많은 미움을 받으셨는데 실제로 조선인 청년들한테 매 맞고 쫓겨난 일화도 비일비재하고요. 또 하나는 일하던 탄광이 무너지는 사고 통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건이죠. 놀랍게도 '내가 살아난 건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마음먹고 더 열심히 전도하셨다는 거죠. 그런 모습에 조선인들도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Q. 오다 나라지 목사님은 일본 본명보다 '전영복'이란 한국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유진주 감독 : 거기에도 에피소드가 있어요. 재일조선인 할머니가 목사님이 일본인이라고 하자, 너무 무섭다고 심방을 거부하셨대요. 그때부터 일본 이름을 더욱 철저히 버리고 조선인으로 사셨습니다.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설교하는 모습도 자료에서 찾을 수 있었어요.

영화 속 한 컷을 위해, 자료 찾아 삼만 리!

유진주 감독 : 맨땅에 헤딩하듯이 시작했어요. 자료 하나하나가 희박한 분들이었죠. 그 이유는 '그리스도만 드러나고, 본인들은 철저히 숨기는' 선교 철학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화 속 인상적인 대사로 많이들 언급하시는 게 '수치는 우리에게, 영광은 하나님께'예요. 삶을 그렇게 사신 분들이에요. 그러다 보니 실낱같은 자료 한 조각 찾으면, 그걸 동아줄 붙잡고 가듯이 따라갔어요. 한 조각, 한 조각 퍼즐 맞추듯이, 마치 숨바꼭질하듯 말이죠. 제작진들끼리도 '과연 이게 될까?' 싶었지만, 돌아보면 '그래도 즐거웠다', 웃으며 말하게 됩니다.

Q. 영화를 찍으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

유진주 감독 : 오다 선교사님의 묘를 찾으러 일본에 갔었습니다. 첩첩산중, 정말이지 가족 말고는 알 수 없는 곳이었죠.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간 곳이다 보니 카메라에 어떻게 담을지를 더 고민하게 됐어요.' 장비를 뭘 쓰고, 어떤 구도로, 어떻게 찍을 것인가?'란 질문이 머릿속을 꽉 채웠죠.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해가 넘어가면 찍을 수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조연출을 맡은 다빈(PD)이가 혼자 눈물 닦으면서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순간 머리가 띵~, 했죠.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난 지금 이 작업을 일로만 대하고 있구나.'라는 부끄러움이 훅 끼쳐왔어요. 이 일을 하는 이유, 사명을 다시 정비하게 된 찰나였죠. 지금도 그때가 생생합니다.

Q. CGN의 많은 직원이 카메오로 출연했다는 얘기도 재미있다.

유진주 감독 : 감사하게도 많은 직원들이 기꺼이 출연해 주었습니다. 현실적인 이유는 제작비 때문이었어요. 다큐멘터리지만 드라마 타이즈가 있는 영화이고 특히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극이었기에 인건비나 소품 하나하나가 전부 돈이었죠. 그런 부분을 간과할 수는 없었어요. 다행히 동료 직원분들의 참여 덕에 특별한 의미까지 더해진 것 같습니다. 시사회에서 CGN 직원들이 엑스트라라고 하면 다들 빵 터지세요.

Q. 소재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는지? 또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유진주 감독 : 스탭 섭외 과정에서 왜 일본인이 선교했다는 영화를 굳이 만드냐고 화내는 분들도 있었어요. 일본인 선교사에 대한 의문과 거부감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강하게 접했죠. 하지만 그들의 삶을 진짜로 알면 이해하리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영화에 인터뷰로 참여해 주신 서정민 교수님(前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실존적인 한국인'' 한 사람의 실존적인 일본인'이 만나는 게

한일 관계다.

결국은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내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인사이트를 스스로 얻어 가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무명>은 정답을 정해 놓은 영화가 아니거든요. 각자한테 주는 메시지가 전부 다를 겁니다.

바라기는 극장을 떠날 때, 작은 돌멩이 하나가 얹힌 기분으로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두 선교사님의 삶을 통해 '그래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라는 고민을 스스로 하게 되길 바랍니다.


유진주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다윗의 물맷돌'을 수없이 떠올리고 묵상했다고 합니다.

영화 개봉까지의 지난하고 녹록지 않은 과정들, 결과에 대한 고민과 걱정을 놓고 기도할 때

'다윗의 물맷돌'처럼 하나님 손에 들리면 된다는 결론을 얻었죠.

돈이 지배하는 세상의 셈법이 아니라 '누군가 단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라는 단단한 마음을 먹게되었죠.

보는 이의 삶에 작은 돌멩이로 던져져 파장을 불러오는 일. 그것이면 족하다는 감독의 말은 인터뷰를 마친 후에도 곱씹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영화를 본다면 그 말을 충분히 공감하리라 여겨집니다.

<무명>은 현재, 전국 롯데시네마에서 상영 중입니다.

'다윗의 물맷돌' 같은 이 영화가 여러분의 삶에도 던져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