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유진주, 내레이션 하정우, 러닝타임 90분, 6월 25일 개봉
기자 시절, 전국에 흩어져 있는 100주년 교회들을 소개하는 기획물을 연재한 적이 있다. 그때 취재를 위해 여러 교회를 찾아다니며 가장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이 사료의 부족이었다. 교회는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지만, 남아 있는 고증 자료는 거의 전무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이가 많은 교인들을 찾아가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교회 설립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취재의 전부였다.
영화 <무명無名>의 제작진 또한 비슷한 경험을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온 일본인 선교사가 있었다.’ 이 막연한 단서에서 출발한 이 다큐멘터리는 몇 개의 실낱같은 단서들을 좇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두 명의 일본인 선교사의 삶을 추적한다. 빈약한 자료와 자료 사이의 무수한 빈 공백은 드라마 형식을 차용한 상상력으로 메워 가며 이들은 누구였고 왜 조선에 왔으며, 그들의 삶은 오늘 우리의 삶과 어떤 연관을 지니고 있는지, 또 이들을 통해 되새기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지를 묵직하게 재조명한다.
일본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노리마츠 마사야스
영화에 등장하는 첫 번째 일본인 선교사는 노리마츠 마사야스(乘松雅休, 1863-1921). 일본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가 된 마사야스는 원래 사무라이 집안의 장손이었다. 메이지대학 신학부에 다니다가 영국 플리머스 형제단 소속 선교사 브랜든의 영향을 받아 플리머스 형제교회로 이적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소식에 충격을 받은 그는 조선 선교를 결심하게 된다. 제물포를 통해 경성으로 들어온 마사야스는 조선인 청년 조덕성을 만나 한글을 배우고 노방전도도 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강한 냉대에 당황하기도 했다. 이후 수원으로 내려가 전도활동을 계속하며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사죄를 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영화에는 당시 노리마츠 마사야스가 전도활동을 하면서 경험했던 물질적 결핍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양식이 떨어진 마사야스의 아내 사도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시장에 내다팔고 양식을 구해 온다. 머리카락에 대한 당시 일본 여성의 의식은 명확했다. 자신의 생명에 버금가는 중요한 것으로 머리카락을 잘라 판다는 것은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헌신적이었던 아내 사도는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영양실조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전도활동을 계속했던 노리마츠 마사야스는 수원 동신교회를 비롯하여 장호원과 안성에도 교회를 설립했고 경북 경주, 충북 음성 등지의 38개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며 400명의 신도를 얻었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몸을 혹사한 결과 결핵을 앓게 된 마사야스는 일본으로 돌아가 요양 중에 소천한다. 조선에 들어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전도활동을 계속했던 노리마츠 마사야스의 마음은 수원 동신교회 뒤뜰에 남아 있는 기념비 속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시작도 사람을 위해 그 생애 충애(忠愛)뿐몸소 사랑을 띠고 그 모든 소유를 버리고
부부 한마음으로 복음을 한국에 전하였노라.
심폐(心肺)의 모진 아픔, 피골이 얼고 주려
수족은 병으로 어우러져 그 한국에서의 희생 극심하도다.
그러나 그 거동이 오직 의지하여 쓰고 단 즐거움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그 생애는 기도와 감사만이로다.
우리 많은 형제를 얻고 주와 함께 모이고 주의 영광이로다.
임종하는 말에 한국 형제 일을 잊지 않고
그 뼈를 한국에 남기기를 원하였노라.
이에 우리의 심비(心碑)를 삼는 까닭이며
주의 재림 날에 이르리로다.
한복 입은 일본인 오다 나라지
오다 나라지(織田楢次, 한국명 전영복, 1908-1980)는 노리마츠 마사야스의 뒤를 이어 1928년 조선으로 들어온다. 교단의 원조나 아무런 외부의 도움 없이 목포에 도착한 나라지는 며칠을 굶고 헤매다 가까스로 일본광주교회에 도착한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전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충고에 깊은 고민에 빠졌던 나라지는 다시 경성으로 향한다. 배가 고파 나환자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기도 하는 등 온갖 고생 끝에 경성에 도착한 나라지는 교회 청년회 일을 도우며 한글을 독학한 후 함경북도 성진으로 떠난다.
함경도 일대를 떠돌며 전도활동을 하던 오다 나라지는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기도 하고 함경도 무산에서는 독립운동가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기도 한다. 특히 신사참배와 관련해 평양 숭실대학교 강당에서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소리는 거짓말”이라고 말했다가 수감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오다 나라지는 이 일로 인해 결국 일본으로 강제 추방된다.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
영화 <무명>은 이 두 일본인 선교사의 삶을 추적하며 관객에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두 사람은 왜 이런 힘들고 고통스런 삶을 선택했을까?” 일제강점기 조선 땅에서 일본인이 조선인을 전도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평생 일본의 만행을 대신 사죄하며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주었던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졌다.
영화의 카메라가 좇아가는 두 전도자의 삶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 속에 ‘팩트’보다 더 중요한 ‘의미’라는 함의가 뜨겁게 내포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한 인간의 헌신과 희생’이 가져올 수 있는 최선의 결과란 무엇인가, 그리고 ‘기독교적 사랑’이 추구하는 지향점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영화가 소개하고 있는 두 전도자의 삶이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다.
90분에 걸친 이 다큐 영화의 러닝 타임을 고스란히 겪어낸 관객들은 아마도 영화관을 떠나며 단 하나의 결론을 마음에 품게 될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이들처럼 살라”는 또 하나의 지상명령이다. 그리고 마음속의 그 ‘빛’이 꺼지지 않는 한 세계를 향한 사랑의 여정은 또 다른 노리마츠 마사야스와 오다 나라지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될 것이란 암시 또한 이 영화가 주는 또 다른 메시지이다.
출처: 복음과도시, 글: 김지홍(작가)